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프랑스 부르고뉴(Bourgogne) 지역은 파리에서 동남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비옥한 평야와 구릉지대가 많아 세계 최고 품질의 와인이 생산됩니다. 프랑스 전체 와인 생산량의 5%밖에 되지 않는 희소성으로 높은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르고뉴 포도밭 체험과 와이너리(와인 양조장) 시음을 하기 위해 굳이 프랑스행 비행기 티켓을 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바로 5월에 찾아온 프랑스영화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 덕분입니다. 영어 타이틀은 <백 투 더 버건디(Back to the Burgundy)> 즉 ‘버건디로의 귀환’입니다. 자줏빛 붉은색을 뜻하는 ‘버건디’는 부르고뉴 지방에서 나는 와인을 일컫습니다. <부르고뉴, 와인에서 찾은 인생>는 와인영화이면서 성장영화이고 가족영화입니다. 그리 크지 않는 포도밭을 한평생 일구며 부르고뉴 와인을 만들어 왔던 아버지가 위독합니다. 호주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큰아들 장이 10년 만에 위중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찾아옵니다.
장은 시골에 파묻혀 사는 게 싫어 전 세계를 여행하다 아내를 만났고 호주 와이너리를 운영하다가 10년 만에 귀향을 합니다. 연로한 아버지를 대신해 와이너리를 도맡아 책임지고 있는 둘째 줄리엣은 큰 오빠를 반갑게 맞이해줍니다. 일찍 결혼한 막내 제레미는 고향마을 근처에서 처가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형이 10년 만에 귀향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왔지만 이내 서운함과 불만을 토로합니다. 형이 10년간 소식을 끊었고 엄마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내미는 동생들에 대한 책임감이 버거웠습니다. 자상했지만 권위적이었던 아버지를 회피하고 싶었던 것도 여행길의 속내입니다. 아버지가 싫어 떠났는데 이제 아버지를 뵈러 찾아온 것입니다. 중환자실 아버지의 손을 가만히 잡아봅니다. 이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삼남매는 깊은 슬픔의 포옹으로 서로를 위로합니다. 아버지가 떠난 후 포도밭, 양조장, 집이 세 남매에게 공동유산으로 상속됩니다. 3인 공동명의인지라 한 사람의 동의라도 없으면 부동산 처분도 불가능합니다. 최근 부르고뉴 땅값이 치솟아 토지값은 60억원으로 평가되는데 상속세만 5억이 나옵니다. 세 남매는 익어가는 포도를 수확하는 데 온 신경을 써야하는데 상속세 문제로도 골치를 앓습니다. 와이너리를 팔아야 할지, 포도밭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할지 고민하지만 별 뾰족한 해법이 안 보입니다.
각본을 직접 쓴 세드릭 클라피쉬 감독은 부르고뉴 시골을 직접 걷고 있다고 착각을 할 정도로 프랑스 포도밭의 사계절을 꼼꼼하게 연출합니다. 포도 재배, 수확, 압착, 발효, 숙성, 테이스팅의 과정을 다큐멘터리 찍듯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낭만만이 가득할 것 같은 프랑스 와이너리는 땀방울과 노동과 인내가 전제조건이었습니다. 당도와 산도를 체크해 포도를 딸 시기를 결정하고, 발로 눌러 압착한 포도를 오크통에서 숙성한 후 시음을 통해 병에 담는 최적의 타이밍을 선택하는 것도 오랜 내공을 갖추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과학적인 성실함 없이 대충대충 감으로 굴러가는 경작의 과정은 애초에 불가능했습니다. 와인 한 병 속엔 농부의 땀과 연륜의 과학성, 하늘과 땅의 조화가 담겨있음을 보여줍니다.
장남 장은 사실 호주에 있는 아내와 갈등관계에 처해 있습니다. 둘째인 줄리엣은 와이너리 책임자로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버거움이 상당합니다. 막내 제레미는 처가살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각자 일련의 성장통을 겪으며 부르고뉴의 삶은 단단해져 갑니다. 삼남매는 드디어 결정합니다. 부모님이 남긴 모든 것을 지키기로 합심합니다. 부모가 유산으로 남긴 것은 포도밭과 와이너리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삼남매의 우애와 사랑이었습니다. 가족 드라마의 전형성을 내세웠음에도 작위적인 스토리라인이 절제되어 있고 배역과 연기가 자연스러워 영화 보는 내내 유기농 버건디 한 병 마신 것처럼 깔끔합니다.
명품와인 ‘로마네 꽁띠’의 고향, 부르고뉴에 가보고 싶나요. 스크린 속으로 풍덩 빠져보세요. 이제 와인을 마시면 술맛뿐만 아니라 와이너리의 사계절 풍광이 떠오릅니다. 한 해 동안 포도밭 농부들이 무슨 일을 하고 무슨 고민을 하는지, 포도농장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와인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지, 수확을 끝낸 후 포도밭축제는 어떻게 열리는지 일련의 장면이 꼬리를 잇습니다. 영화의 프랑스 타이틀은 <무엇이 우리를 묶는가(Ce qui nous lie)>입니다. 영화 말미 장남 장의 혼잣말이 흐릅니다. “와인처럼 사랑도 시간이 필요하더라. 시간이 흐른다고 다 상하는 건 아니었어.”
세 남매는 부르고뉴 포도밭에서 최고의 와인을 만드는 최적의 와이너리를 향한 우애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최종 유산임을 깨닫습니다. ‘와인의 낭만’보다 ‘와인의 현실’을 찬찬하게 보여주는 점이 이 영화가 가진 상큼한 미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