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고레에다 감독 ‘어느 가족’


평생을 홀로 살아온 막노동꾼 중년남자가 있습니다. 그를 중심으로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가족 공동체가 관객 앞에 나타납니다. 구성원 모두 타인으로 만나 한 사람씩 모이게 된 ‘외인구단 가족’입니다. 가족은 연금 생활자인 할머니의 가난하고 좁아터진 집에 둥지를 틉니다. 겉으로 보면 3대가 어울린 정상 가족 같습니다. 세탁공장에 나가는 중년 여자는 집안 살림을 도맡으며 엄마 역할을 합니다.  성인업소에 나가는 20대 여자, 파친코에 버려진 소년이 중년남자에게 눈에 띠여 외인구단 가족 안으로 들어옵니다. 마지막으로 부모의 폭력에 퍼렇게 멍든 어린 소녀가 합류합니다.
딴 살림을 차린 남편에게 버림받았던 할머니는 이제 죽은 남편이 남긴 연금으로 기진맥진한 여생을 연명하고 있습니다. 중년 사내는 소년에게 학교는 집에서 혼자 공부하지 못하는 애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세뇌시킵니다. 좀도둑질이 특기인 남자가 소년에게 자신의 특기를 전수합니다. 살림에 꼭 필요한 물건을 상점에서 훔치는 기술을 가르칩니다.


 # 타인으로 만나 끼니를 나눈다는 것
중년 여자에게는 가정폭력의 과거가 있습니다. 폭력 남편으로부터 탈출할 때 지금의 중년 남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중년 여자와 중년 남자는 과거 사연을 공유한 흔적이 뚜렷합니다. 손님에게 스트립쇼를 보여주며 생계를 유지하는 젊은 여자는 늘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할머니 품에 안기고 싶어 합니다. 소년은 소녀에게 오빠라 부르지 말라고 하지만 결국은 오빠 역할을 합니다. 소년은 소녀를 항상 챙깁니다. 가족의 마스코트가 된 소녀의 웃음소리는 이 특별한 가족 구성원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작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머리를 맞대며 컵라면을 먹고 라면 국물에 고로케를 적셔먹습니다. 초라한 밥이지만 함께 끼니를 나누며 대화하는 식구가 됩니다. 거실에서 한 이불을 덥고 잡니다. 좁은 집은 그들에게 크게 좁아 보이지 않습니다.
원래 가족이 아니니 가족이라고 우기지 않습니다. 무어라 부를 이름이 없는 무명(無名)가족입니다. 거주지가 명기된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회가 인정한 정상가족이 아니니 경찰을 맞닥뜨리면 무조건 피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주거지가 불분명하니 일시적으로 동거하는 가족입니다. 혈육으로 이어진 정식 가족과는 전혀 다른, 전원이 비혈육 임시 가족입니다. 제도와 법의 사각지대인 응달에 숨어 지내는 가족은 불법가족으로 낙인이 찍힐까봐 늘 마음이 조마조마합니다.


 # 고레에다 감독의 시선엔 늘 상처받은 가족
일본 영화계의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영화 <어느 가족>에서 ‘나누다’ ‘보듬다’ ‘바라봐주다’ 이 세 가지 동사를 생생하게 부활시킵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부모님의 사망진단서를 제출하지 않고 연금을 부정 수급해오다 체포된 어느 가족의 실화를 모티프로 삼았습니다. 일본어 원제는 ‘좀도둑 가족’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소설가로도 맹활약합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려보고 싶다”고 소신을 밝힙니다. 감독의 시선 중심엔 늘 상처를 가진 가족이 있습니다.
상처와 결핍으로 버거운 삶을 살다 만났지만 외인부대 가족은 서로를 쓰다듬고 부둥켜 안아줍니다. 마음을 나누지 않고 가슴을 보듬지 않는 혈육가족의 허상을 깨닫게 합니다. 바라봐주고 껴안아주는 ‘무명가족’은 사회가 돌봐주지 않는 상처에다 자신들끼리 조제한 감성의 약을 상처부위에 뿌려 점차 낫게 합니다. 물론 <어느 가족>은 미래의 대안 가족이 아닙니다. 사회안전망 밖으로 내팽개쳐진 불안한 가족이고 안팎의 범죄에 노출이 잦아 언제든지 해체 가능한 불온한 가족입니다.
<어느 가족>이 일본을 떠받치고 있다는 중산층 주류가족의 틀에서 벗어났다고 손가락질 당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일본이 아닌 한국 상황을 대입해도 절대 무방한 영화. 가족절대주의는 어떻게 변할까요. 낳은 자식만이 자식일까요. 피로 이어진 가족만이 가족일까요.
혈연가족주의로 뭉쳐졌던 가족의 정의는 균열을 보이고 있습니다. 가족은 결코 변치 않는 게 아니고 변화 가능한 울타리로 변하고 있습니다. 구성원 개개인이 맺는 인간관계가 가족의 본질로 자리 이동하고 있습니다. ‘좀도둑 가족’은 진정한 가족의 울타리란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영화는 즉각 대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답해보라고 읊조리곤 뒤돌아섭니다. 마음으로 이어졌던 한때의 가족은 강력한 유대감이란 추억을 품습니다. 미래 가족의 예후를 담담하게 암시하던 가족은 흩어집니다.
 무언가를 훔쳤던 무명가족 내에서 엄마 역할을 하던 중년 여자의 무장 해제된 대사가 가슴을 콕 찌릅니다. “버린 게 아니라 주워온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니에요? 사랑하면 결코 때리지 않아요. 피로 이어지지 않은 가족이라 좋은 점도 있지요. 서로 기대하지 않아서 괜찮아요.” 이 이상한 무명가족은 무엇을 훔쳤을까요. 그들은 사회가 버린, 혈연가족이 버린 가족을 훔쳐 자신들만의 무명가족을 꾸려 서로 어루만졌을 뿐입니다.
서울 거리를 걷다보면 기초복지와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부랑 시민을 많이 봅니다. 2018년 대한민국은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처음으로 14%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나 고령사회가 되었습니다. 유엔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이면 고령화 사회, 14% 이상은 고령 사회, 20%를 넘으면 초고령 사회로 구분합니다. 2017년 한국에서 홀로 생활하는 ‘1인 가구’는 562만 가구입니다. 일반 가구의 30%에 육박합니다. 사회안전망이 미비한 1인가구 고령사회가 대한민국의 민낯이 되고 있습니다. 고레에다 감독의 <어느 가족>이  한국의 <어느 가족>과 많이 동떨어져 있을까요. 2018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영화칼럼니스트 김용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