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국편집기자협회 (edit@edit.or.kr)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감독: 사라 폴리
출연: 사라 폴리, 마이클 폴리, 레베카 젠킨스


캐나다의 대표 여성 감독 사라 폴리(Sarah Polley·40)는 아역 배우 출신에 개성 있는 연기로 캐나다 ‘국민여동생’으로 유명했습니다. 이제는 영화 연출자로 탁월한 기량을 펼치고 있습니다. 2013년 사라는 자전적 다큐영화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Stories We Tell>로 관객에게 다가옵니다.
캐나다의 유명 연극배우인 마이클 폴리와 다이앤 폴리 사이에 태어난 사라는 11살 때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 다이앤의 생애를 추적한 다큐멘터리입니다. 갑작스런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의 삶을 따라가기 위해 사라 감독은 가족들과 다이앤의 옛 동료들을 심층 인터뷰 합니다. 과거시절 다이앤을 기억하는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 배경으로 가족들이 소장한 홈비디오 동영상과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비춰지고 실제 과거 상황을 생생하게 연출한 재연 장면들이 보태집니다. 즉 팩트를 기반으로 한 다큐와 개연성의 재연극 사이를 넘나들면서 엄마 다이앤의 수수께끼 같은 한 평생을 추적합니다.
다이앤은 활달하고 시끌벅적하고 늘 부산한 여성이었다는 증언이 나옵니다. 그녀는 목청 큰 목소리와 파안대소 그리고 허둥지둥 서두르며 뭔가 실수한 듯한 표정이 잦습니다. 아들은 엄마를 “대단히 요란했다”고 회고하고 딸은 엄마를 “쾌활 발랄 생기가 있으며 에너지가 넘쳤다”고 증언합니다. 같은 연극 무대에 올랐던 옛 동료는 “뭔가 비밀이 있는 사람이었지. 왁자지껄한 성격이긴 한데 아무도 모를 속내를 감추고 살아가는 그런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다이앤은 좋은 가문의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남편은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다이앤을 집안에다 꼼짝없이 붙들어 놓습니다. 그러다 그녀는 두 아이들이 있었지만 외도를 감행했고 이 사실을 들킨 다이앤은 자녀양육권을 박탈당한 채 이혼합니다. 두 번째 남편이 동료 연극배우인 마이클입니다. 무대에 서면 에너지 넘치는 연기를 하는 마이클에게 빠져 결혼에 이릅니다. 사실 무대 밖의 마이클은 조용하고 내성적인 인물입니다. 부부는 토론토에 기반을 잡습니다. 마이클은 보험회사 간부가 되고 다이앤은 아이들을 낳고 양육에 몰두합니다.
세월이 흐릅니다. 진취적이고 자유분방한 전직 연극배우 다이앤에게 연극무대에 다시 서고 싶은 꿈이 꿈틀거립니다. 다이앤은 양육을 대신 맡겠다는 남편 마이클의 격려에 힘입어 연극의 본고장 몬트리올로 떠납니다. 권태기 다이앤에게 몬트리올은 새로운 활력을 줍니다. 다시 무대에 서니 예술인으로 부활한 것 같고 연극인들과의 교제는 넓어집니다. 몇 달 후 몬트리올을 찾아온 마이클과 재회한 다이앤. 부부는 권태기를 털고 다시 뜨거운 사랑을 합니다. 이때 다이앤은 마흔 두 살이란 늦은 나이에 늦둥이 딸 사라를 임신하게 됩니다. 무대를 뒤로 하고 주부와 아내로 복귀한 다이앤은 가정에 충실한 삶을 보내다, 사라가 11살 무렵 오십대 초반에 갑작스럽게 발견된 암으로 유명을 달리합니다.
여기까지 영화는 엄마 다이앤을 중심으로 평범한 가족사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사달이 일어납니다. 온 가족이 돌아가신 엄마의 빈자리가 주는 상실감을 극복할 무렵, 오빠와 언니는 막내 사라에게 짓궂은 농담을 건넵니다. “넌 왜 이렇게 아버지를 안 닮았냐?” “아무리 봐도 넌 아빠의 유전자는 안 물려받은 것 같아.” “네가 태어난 게 00년도니까 엄마가 몬트리올에서 연극을 할 때 임신을 한 셈이고, 혹시 엄마가? 연극 동료 중에서 너랑 닮은 사람은 이 남자들인데? 특히 이 사람이야 이 사람!” 농반진반 언니 오빠의 의구심은 꼬리를 뭅니다.
이제부터 사라 폴리식 다큐멘터리의 힘이 발휘됩니다. 사라 감독은 엄마의 옛 남자동료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시도합니다. “혹시 우리 엄마랑 뭔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혹시 우리 엄마랑 잤나요?” 사라 폴리의 진실을 향한 본격적인 탐문이 시작됩니다. 용의자(?)는 쉽게 발견되지 않아 수사(?) 범위는 넓어집니다.
당시 연극 제작자였던 해리를 찾아갑니다. “그 시절 우리 엄마와 일이 벌어질 만한 연극배우가 있었나요?” 놀라운 대답이 돌아옵니다. “사실, 다이앤은 나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한꺼번에 2가지 의문이 풀립니다. 내 엄마와 한 때 뜨겁게 사랑했던 남자, 그리고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 버거운 진실을 맞닥뜨린 사라는 망연자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해리는 사라의 생물학적 친부로 밝혀집니다.
리얼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감독으로서 사라는 흥분하지 않습니다. 본인도 이미 이혼 경험이 있는 재혼자입니다. 아빠 마이클에게 굳이 이 다큐영화의 내레이터를 맡깁니다. 오빠 언니이지만 인터뷰를 하는 설정에선 인터뷰이(interviewee)와 인터뷰어(interviewer)로서 역할을 분명히 합니다.
엄마와 사라의 진실이 밝혀지자 형제자매들의 반응은 위트로 가득 찹니다. “그래? 어쩐지.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엄마에 대해 배신감을 토로하거나 비난, 울부짖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되레 엄마의 성격과 여동생의 생김새에서 출발한 자신들의 추측이 진짜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고 즐거워합니다. 인터뷰 모습은 인위적 설정이 아닌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어머니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둘째 딸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어머니가 누군가에게 사랑받았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 기쁘다며 눈물을 흘립니다. 어린 자신이 기억할 때 어머니는 분명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으나 남편에게서 충분할 만큼 정서적인 만족을 얻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엄마가 바람을 폈다는 게 어쨌다는 거지? 오히려 사랑을 찾아 나설 줄 알던 여자의 용기에 감동받았다.” “아버지의 무뚝뚝함에 나름 책임이 있을 수 있지.”
영화의 앵글은 유명 감독 사라 폴리의 출생 비밀로 첫 초점을 잡더니 이제는 밝혀진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진술할 것인가라는 이야기의 서술방식으로 방향을 틉니다. 친딸로 알고 있던 막내에게 자기의 친부는 몬트리올에 따로 있더라는 고백을 듣는 아빠 마이클. 다이앤의 남편으로서 사라의 아버지로서 담담하게 인터뷰에 답합니다. “아이들 농담인줄만 알았는데… 사실 난 너가 나랑 꽤 닮았다고 생각했다. 다이앤이 임신했을 때 사실을 말했어도 충분히 받아들였고 여전히 널 사랑했을 거다. 분명한 사실은 다이앤이 그 남자와 사랑을 나누지 않았다면, '지금의 너'는 없었을 거 아니냐. 네가 내 친딸이었다면 ‘지금의 너’가 아닐 것이다. 나는 지금의 너를 사랑하고 네가 태어났다는 사실이 고맙다. 그래서 그 남자 해리에게도 감사하단다.”
아내의 외도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 태어난 딸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지 못했고 지금 늙은 아빠의 곁에 머물러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이 남자를 어찌할까요. 가족 모두는 아내와 엄마였던 다이앤의 행위와 판단을 부정하지 않고 존중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이앤의 다이나믹한 생애의 ‘결과물’인 사라 폴리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딸이자 막내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부끄러운 가족사가 될 뻔한 스토리를 세상에 공개한 사라와 그 가족의 용기가 대단합니다. 엔딩 자막은 특별합니다. 인터뷰에 응한 이들을 스토리텔러(Storyteller)라는 항목으로 먼저 배치합니다. 세상에 소소한 스토리는 차고 넘칩니다. “왜 그렇게 살았느냐”고 비난하지 않고 “당신의 삶을 인정한다. 당신의 판단을 믿는다”고 경청해주는 가족들. 여기에서 진정한 스토리는 씨앗을 뿌립니다.
삶은 스토리를 먹고 자랍니다. 스토리가 빠진 일상은 손가락 사이 모래알처럼 빠져 나가버립니다. 스토리를 엮는 최적화의 편집은 무얼까요. 스토리를 풀어가는 놀라운 방식이 새삼 감동의 밀물로 밀려듭니다. 다큐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는 돌아가신 엄마를 기억하는 한 가족의 객관과 주관 사이에서 팽팽하고도 탁월한 줄타기였습니다.
PS) 사라 폴리 감독은 노부부의 45년 발효된 사랑이 아내의 치매로 흔들리는 풍경을 포착한 영화 <어웨이 프롬 허, 2006> ‘익숙해져버린 사랑’과 ‘설레는 사랑’ 사이에서 번민하는 여자의 심리를 잘 녹여낸 로맨스 영화 <우리도 사랑일까, 2011>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칼럼니스트